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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webzine(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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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itute
of korean confucian culture25
12웹진 솔비움
‘뒷모습’의 계절
남 형 권 진흥원 기획조정부 책임연구원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얼굴보다 등에서 세계를 읽었다. ‘평범한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의 사진들에 자신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글을 더해 펴낸 책 『뒷모습(VUES DE DOS)』에는 말그대로 뒷모습만이 담겨 있다. 뒤돌아선 인물과 장면들이 남기는 그윽한 침묵. 걷고, 기다리고, 일하고, 결혼하고, 떠나는 순간들에서, 사진은 단지 등을 포착했을 뿐인데, 얼굴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애써서 설명하지 않지만 오히려 진실하다. 늦가을 바람에 유영하듯 뒹구는 낙엽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기억 속 ‘뒷모습’들의 장면이 겹쳐 올랐다.
우리가 이해하고 말하려는 세계는 대부분 앞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모습은 늘 설명을 요구한다. 눈빛은 판단을 부르고, 표정은 의미를 짓는다. 말은 각자의 입장만을 강조한다. 분명 내가 믿는 육안으로 확인한 앞모습인데 잘못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뒷모습은 말하지 않는다.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가라앉힌 침묵 속에서 더 먼 곳을 향해 깊이 나아갈 뿐이다. 그 고요는 더 많은 것을 남긴다. 시간이 지나 되짚어보면, 가장 선명한 기억은 언제나 뒷모습이다.
어린 시절 조그만 동네 목욕탕에서 아버지의 등을 밀던 풍경이 떠오른다. 자욱한 김, 냉탕에서 신나게 첨벙대는 꼬마들의 소리, 세신사 아저씨가 물 뿌리는 소리, 그리고 흐릿한 얼굴과 달리 또렷하게 보이던 아버지의 등. 넓기만 하던 등이 어느 순간 작아 보였고, 그 작아짐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처음 감지했다. 나이는 앞에서 보이지 않고, 뒤에서 먼저 드러난다.
오래 전 첫사랑과 헤어지던 어느 여름 초저녁, 하늘은 아직 어둠을 머금지 못하고 있었다. 끊어진 철길이 놓인 공원에 서 있었고, 고깃집과 호프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들뜬 얼굴로 길을 오갔다. 가까이엔 어린 커플이 배드민턴을 치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선. 냉담한 말과 달리 차오르던 눈물을 숨기던 뒤통수. 한참을 앞만 보며 걷던 그녀가 멀어지는 마지막 걸음을 바라보았다. 끝내 뒤돌아보지 않으려던 그 뒷모습은, 어떤 문장보다 정확하게 이별의 온도를 전했다.
얼마 전엔 주말 공원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돌을 모으느라 몰두하던 아이의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상처 하나 없는 그 천진난만한 등은 이제 막 시작하는 생(生)의 순도와 가벼움을 온전히 품고 있었다. 무궁한 호기심으로 세상을 만지며 아무렇지 않게 몸을 기울이던 그 자세에서 잊고 지내던 삶의 첫 문장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문득, 나의 뒷모습을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게 나는 어떤 결말로 남았을까. 앞모습이 현재를 설명한다면, 뒷모습은 시간이 남긴 진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의 내밀한 사정과 흔적을 충분히 읽지 못한 채 스치고, 사랑하고, 떠날 뿐이다. 그리고 다시, 오늘 내가 마주한 어느 뒷모습들을 떠올려본다. 말보다 정확한 것들이 그 짧은 순간에 담겨 있었다.
늦가을의 풍경은 적막하고 쓸쓸하지만, 그래서 더 뒷모습을 닮았다. 단풍은 마지막 혼을 태워 찬란함을 모두 불사른 뒤,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되어 땅 위로 내려앉는다. 그러나 떨어지는 낙엽은 소멸과 동시에 단풍을 다시 강렬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비로소 가을이라는 계절이 완성된다. 사람도, 돌아서서 떠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이해에 닿는다. 올해의 늦가을, 나는 다시 뒷모습의 세계를 배운다. 떠남의 풍경 속에서, 내 그림자 또한 조용히 형태를 갖춰간다.
시대의 지성이었던 이어령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에요.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에요.” 뒷모습의 시는 어쩌면 지성보다 영성에 더 가깝다. 묵묵히 서 있는 뒷모습은 삶의 깊은 진실을 품고, 넓고 너른 이해와 한없는 포용의 바다를 펼쳐보인다. 뒷모습은, 도리어 앞모습보다 겸허하고, 정직하고,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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