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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webzine(20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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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웹진 솔비움
선비의 산수정원, 구곡 – 선비와 구곡
김 봉 규 문화칼럼니스트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하나, 역사적으로는 유교 이념을 구현하는 사람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유교(성리학)의 도를 추구하는 선비士는 현인賢人이 되고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성현聖賢이 되고자 노력하는 선비들이 만들어온 문화 중 구곡九曲문화가 있다. 구곡은 그들이 공부하며 머무는 곳의 계곡이나 하천 곳곳에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어, 성리학적 세계관을 담은 심신수양 공간으로 만들었던 산수정원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산속 계곡의 아홉 구비를 뜻하는 이 구곡은 선비들이 물굽이가 있는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에 정자나 정사를 지어 심신수양을 하며 즐기던 자연 공간이었다.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상이 녹아있는 산수정원이었다.
구곡은 단순히 풍광이 빼어난 곳이 아니라, 조선 선비들이 추구한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한 공간이었다. 구곡은 유학을 집대성해 새로운 유학(성리학)을 정립한 중국 성리학자 주자朱子에서 비롯됐지만, 중국보다 조선에서 훨씬 더 성행하고 발달했다. 선비들은 구곡을 설정하고, 그것을 매개로 구곡시를 짓고 구곡도를 마련해 걸어놓고 보면서, 성리학의 이상을 정립하고 실천하려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의 구곡문화는 확대·심화되면서 우리의 산천을 인문학의 보고로 만들어 갔다.
이황에서 비롯된 도산구곡(안동), 이이의 고산구곡(해주), 송시열의 화양구곡(괴산), 정구의 무흘구곡(성주) 등이 대표적 구곡이다. 우리나라 구곡의 수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늘어나고 있다. 전국적으로 150여 곳의 구곡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곡문화의 유래
이 구곡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남송의 성리학자 주자(1130~1200)이다. 그의 이름은 희熹이고, 호는 회암晦庵이다. 주자는 푸젠성福建省의 우계현尤溪縣에서 태어나 19세에 진사에 급제한 후 24세 때 처음 벼슬길에 나섰다. 별세할 때까지 여러 벼슬을 받았지만 예우 수준의 명목상 직책이 대부분이었다. 실제 관리로 부임해 복무한 기간은 9년 정도에 불과했다. 주자는 불교와 도교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난 이후 유학으로 복귀해 몰두하면서 그 정통을 계승했다.
주자는 53세 때인 1183년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지어 은거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읊은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짓고, 아울러 정사를 경영하게 된 내력을 적은 '무이정사기武夷精舍記'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7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후학을 위해 강학하고 학문연구에 힘쓰는 한편, 산수의 아름다움을 한시로 노래했다. 그 가운데 구곡의 경영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주자는 1184년 구곡을 설정해 배를 타고 구곡을 따라 유람한 뒤 '무이도가武夷櫂歌' 10수를 지었다. 구곡을 설정해 이름을 붙이고 서시와 더불어 곡마다 시를 읊은 이 10수의 무이도가, 즉 무이구곡가는 구곡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구곡문화의 전개
성리학적 가치관을 토대로 건국된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를 지극히 존경하며 받들었다. 그들은 주자의 사상과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무이산에 은거하며 무이구곡을 경영하고 무이도가를 지은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했다. 무이도가를 도학의 완성을 향해가는 단계를 읊은 것으로 본 그들은 주자의 무이구곡과 관련된 삶을 자신들의 삶 속에 구현하려 했다.
그래서 성리학이 정착되던 16세가 조선 지식인들은 무이산과 무이구곡에 대한 글을 기록한 '무이지武夷誌'를 탐독했다. 그리고 무이구곡가를 차운하거나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며 주자에 대한 존경과 감화의 정서를 고양시켰다. 그들은 또 자신의 거처 주위의 산천에 구곡을 설정하고 정자 등을 마련, 구곡시를 짓고 구곡도를 그리는 등 구곡문화를 일궈갔다.
구곡문화의 도화선인 '무이도가'는 고려 말에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나라 구곡문화는 16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이 지배사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기록상으로 소요당逍遙堂 박하담(1479~1560)의 '운문雲門구곡'과 '운문구곡가'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는 1536년 경북 청도의 운문산을 비롯한 동창천東創川 일대의 빼어난 곳을 구곡으로 경영하면서 운문구곡가를 지었다.
비슷한 시기에 퇴계 이황(1501~1570)은 안동에 도산구곡陶山九曲을, 율곡 이이1536~1584는 황해도 해주에 석담구곡石潭九曲을 경영하면서 조선의 구곡문화는 선비들의 필수문화로 자리 잡아갔다. 특히 이황은 무이도가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짓고,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며, 무이지를 읽고,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주인공이다.
이렇게 조선 선비들이 만들어간 구곡문화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문학, 미술이 융합된 조선 성리학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 위에 문학(구곡가)과 예술(구곡도), 건축(누정)이 결합된 구곡문화의 심화·확산은 사대부의 정원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조선 선비들이 애장한 무이구곡도
구곡을 그린 구곡도는 주자의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가 시초이다. 무이구곡은 원나라 이후 주자 성리학의 발원지로 부상하게 되었고, 주자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로서 무이구곡도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무이구곡도는 16세기 때 조선에 전래된 이후 구한말까지 400년 동안 꾸준히 그려진 그림이다. 주자의 삶과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본 무이구곡도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큰 인기를 끌며 유행하였다. 원본을 베껴 그린 모사본이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의 지식인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에게 무이구곡도는 주자와 정서적 교감을 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주자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 가치로 여긴 조선 선비들의 무이구곡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무이구곡도의 초기 작품으로 대표적인 예는 1592년 작 이성길李成吉의 '무이구곡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두루마리로 된 이 그림(가로 4m)에는 화면 전체에 걸쳐 무이구곡의 아홉 굽이가 묘사되어 있다.
무이구곡도 감상층이 점차 확산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무이구곡도를 그리는 사람들도 화원화가와 문인화가, 그리고 무명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세황(1713~1791)의 무이구곡도(25.5㎝×406.8㎝)와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계병契屛 '무이구곡도'이다. 계병은 나라의 큰 행사를 기념해 만든 병풍이다.
성주의 선비인 응와 이원조(1792∼1871)는 1862년 무이구곡도와 함께 무이구곡과 관련 있는 선인들의 글을 엮은 첩인 '무이도지武夷圖誌'를 만들었다. 무이구곡도와 함께 이황, 정구, 정종로가 쓴 무이구곡 차운시와 이상정의 구곡도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무이구곡도에는 주자의 '무이도가'도 담겨 있다. 주자와 무이구곡에 대한 동경심을 읽을 수 있다.
조선 말기의 무이구곡도는 대중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민화로까지 확산된다. 그러면서 뚜렷한 양식 변모를 보인다.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전통 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그림으로도 그려져 대중의 수요와 접목되었고, 이후 상상력이 가미된 민화로 그려졌다. 1785년에 그린 무이구곡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무이구곡의 주요 경물을 의인화 내지 의물화하고 있다. 예컨대 제2곡의 중심 경물인 옥녀봉은 한복을 차려입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그렸다. 옥녀봉이 미인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형상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이처럼 무이구곡도는 대중적 취향을 담은 민화로도 그려짐으로써 상류층은 물론, 중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을 대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무이구곡도는 중국문화의 수용과 한국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문화사에서도 매우 큰 의미 있다 하겠다.

우리나라 무이구곡도의 대표작인 이성길의 '무이구곡도'(부분). 문신인 이성길이 16세기 중국에서 전래된 원본을 1592년에 베껴 그린 작품이다. 길이 4m(세로 33.5㎝)에 이르는 두루마리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이 1753년에 그린 무이구곡도(1곡과 7곡). 이성길의 작품과 달리 주자의 무이구곡시를 담고 있고, 구곡의 위치 등이 표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글. 김봉규
現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前 영남일보 논설위원,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주요 저서로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 「현판기행」, 「조선의 선비들, 사랑에 빠지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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