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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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webzine(202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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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itute
of korean confucian culture25
08웹진 솔비움
바람보다 오래 머무는 마음
남 형 권 진흥원 기획조정부 책임연구원
Copyrightⓒ KIMYOUNGGAP GALLERY DUMOAK. All Rights Reserved 제주에는 해발 200미터에서 600미터 사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솟은 언덕이 약 300여 개 있다. 용눈이, 다랑쉬, 백약이처럼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지닌 이 언덕들은 ‘오름’이라 불린다. 충남 부여 출신의 사진가 김영갑은 이 오름을 각별히 사랑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주에 내려온 그는,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을 오롯이 오름 곁에서 보냈다. 그것은 그에게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삶의 내력처럼 따라붙은 숙명이었다.
Copyrightⓒ KIMYOUNGGAP GALLERY DUMOAK. All Rights Reserved 구도자처럼 그는 날마다 오름을 올랐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머무르며 빛과 바람의 결을 느꼈다. 낮과 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오름은 그에게 단 한순간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찰나를 붙잡은 그의 사진들은, 조용한 열정과 함께 켜켜이 쌓여갔다. 혹독한 겨울의 매서운 바람도 그를 멈추게 하진 못했다. 하얗게 눈 덮인 오름 능선 위, 수없이 많은 발자국이 고요히 새겨졌다.
Copyrightⓒ KIMYOUNGGAP GALLERY DUMOAK. All Rights Reserved 루게릭병으로 더 이상 셔터를 누를 수 없게 되기 전까지, 그는 묵묵히 카메라를 들고 그 곁에 머물렀다. 이방인의 지극한 애정과 정성 어린 눈길을 받은 오름은, 이제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풍경이자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그가 가장 아꼈던 용눈이오름 아래에는 여러 이들의 후원으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 세워졌다. ‘두모악’은 제주 방언으로 한라산을 지칭하는 옛말이다. 매년 10만 명이 넘는 이들이 그곳을 찾아, 그의 시선을 따라 조용한 감동을 마주하고 돌아간다.
Copyrightⓒ KIMYOUNGGAP GALLERY DUMOAK. All Rights Reserved 그가 카메라를 든 이유는 단지 아름다움을 기록하려는 예술적 열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의 소음과 욕망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자연과의 교감, 생명에 대한 경외, 그리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품고 살아가려는 태도였다. 그는 예술가이면서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켰다.
생면부지의 뭍사람이던 그는 어느덧 제주를 대표하는 사진가로 남았다. 죽음을 앞둔 삶의 끝자락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20년 동안 오름 하나도 모르면서 두 개, 세 개에 욕심을 부렸다.
모든 오름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하겠다고 허둥댔다.”
모든 것을 걸고 살아낸 끝에 남긴 이 한 줄의 고백은, 도리어 겸허하고 낮았다.
Copyrightⓒ KIMYOUNGGAP GALLERY DUMOAK. All Rights Reserved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는 말이 있다. 맡은 바는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다는 뜻이다. 김영갑이 걸어온 길은 화려하진 않았으나 깊고 단단했다. 말로 강조하지 않아도, 그의 삶은 이미 충분한 대답이었다.
셔터는 멈췄지만 그의 시간이 담긴 풍경은 여전히 오름 위에, 그리고 사람들 마음속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 발자국으로 남은 무수한 걸음은 누군가에겐 스쳐 지나간 흔적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진심의 무늬로 다가온다.
그는 오름을 바라보되 다 알려 하지 않았고, 그저 곁에 오래 머물렀다. 욕심내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려 했다. 자연 앞에 겸손했고, 삶 앞에 성실했다.
Copyrightⓒ KIMYOUNGGAP GALLERY DUMOAK. All Rights Reserved 그가 보여준 것은 사진 이전의 태도였다. 무엇을 찍느냐보다,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묻는 시선이었다. 그 오래된 응시는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오늘,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며 사랑하고, 자연과 공동체 앞에 잠시 멈추어 서며, 사람 사이를 건너고 있는가. 김영갑의 시선은 말없이 되묻는다. 오래 덮여 있던 책을 펼치다 문득, 페이지 사이 숨어 있던 낙엽 한 장을 마주하듯, 그의 삶은 우리 안에 고요한 숨결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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