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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webzine(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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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도〉 - 강세황과 성호 이익이 우정으로
그린 그림이 경 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1751년 안산에 거주하던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실학의 대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위하여 <무이도(武夷圖)>와 <도산도(陶山圖)> 두 폭을 제작하였다. <무이도>란 주자(朱子)의 강학처였던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던 복건성 무이산 일대를 그린 그림이며, <도산도>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도산서원과 그 주변의 풍광을 그린 그림이다. 두 작품 중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도산도>는 강세황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그림이다.
강세황의 <도산도>를 대하는 감상자들에게 떠오르는 가장 큰 질문은 ‘어떤 사정으로 그가 성호를 위하여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일 것이다.
강세황, 〈도산도〉. 1751, 종이에 수묵, 26.5×138cm, 국립중앙박물관 〈도산도〉의 말미에 적은 강세황의 글에는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가 설명되어 있다. 그 첫부분은 다음과 같다.
성호 선생께서 질병이 위독한 가운데 세황에게 명하여 <무이도>를 그려라 하셨다. 무이도가 완성되자 다시 〈도산도〉를 그려라 명하셨다. 세황이 천하의 아름다운 산수를 헤아려보니 두 장소로 한정할 수 없지만 지금 선생께서 유독 이 두 장소를 선택하여 신음하고 지친 즈음에 모화하라는 것은 주자와 퇴계 두 선생이 중요하기 때문이 어찌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선생께서 선현을 그리워하고 도(道)를 좋아하는 뜻을 급박한 시간이나 황망한 경우에도 잊지 않음을 볼 수 있다.성호는 먼저 〈무이도〉를 그려 달라하였다. <무이도>가 완성되자 다시 〈도산도〉를 그리게 하였다. 강세황은 성호가 두 그림을 그리게 한 이유는 ‘선현을 그리워하고 도를 좋아하는 뜻’이라 설명하였다. 성호가 그림을 요청한 일차적인 이유는 선현의 학문적 길을 따르고자 하는 뜻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유학자에게 두 그림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산도의 내력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도산도의 시작은 16세기 퇴계의 생존 시까지 거슬러 간다. 1555년 이래로 퇴계는 고향에 돌아가 도산 남쪽에 은거하며 강학에 전념하였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은 화공에게 퇴계가 살고 있는 도산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왕은 완성된 <도산도>에 퇴계의 「도산기(陶山記)」와 시문을 곁들여 병풍으로 만들고 곁에 두었다. 퇴계의 후학들은 명종의 예를 본받아 <도산도>를 제작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뜻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주자의 은거지를 그린 <무이도>와 짝을 이루어 소장함으로써 도맥(道脈)의 상징으로 삼았다. 성호가 <도산도>와 <무이도>를 함께 소장하려 했던 것은 남인 사회에 자리 잡았던 관행을 따른 행위였다.


도산서원의 전경 그러나 성호에게 〈도산도〉는 학문적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닌 그림이었다. 성호에게 이 그림이 의미하는 바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글이 있다. 성호의 문집에 수록된 「도산도발(陶山圖跋)」, 즉 도산도를 감상하고 적은 발문이다. 강세황을 만나기 이전인 1739년의 글로 59세가 되는 해였다.
우리나라 사람의 퇴계 선생에 대한 애모(愛慕)의 지극함은 헤아릴 수가 없다. 문집을 읽으며 그 말을 얻고 여러 문인들이 기록한 바를 읽으며 그 제행을 얻었다. 지금도 〈도산도〉에서 그 움직이고 쉬고 유람하고 휴식한 것을 얻었으니 상세하지 않음이 없다. 바위 하나 물가 하나도 쓰다듬고 어루만지듯 생각할 수 있었고 어렴풋이 수염과 눈썹까지 셀 수 있을 것 같았고 마치 기침소리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선생과 같은 인물은 당시에 법이 되었고 후세에 전해질 만 하다. 나는 거의 시골 사람만도 못하여 평생 백가지 일을 생각하고 헤아렸으며 고인을 닮기를 구하였으나 한 부분도 닮지 못하였다. 다만 우연히 같은 신유년에 태어나 매우 행복하다. 아! 그러나 여기에 그칠 뿐이니 슬퍼할 따름이다.성호는 젊은 시절 도산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의 실경을 그린 〈도산도〉를 마주한 그에게 도산서원의 풍경이 눈앞의 현실처럼 생생하게 떠올랐을 것이다. 그는 그림 속에서 퇴계가 학문에 힘쓰고, 휴식하고, 유람하는 모습을 보며 마치 그와 직접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처럼 퇴계의 존재를 현실처럼 느끼는 한편, 성호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슬픔과 아쉬움도 함께 느꼈다.
〈도산도〉는 성호에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 퇴계의 실존을 느끼고, 고인과 마음을 나누는 통로였다. 강세황은 성호에게 〈도산도〉가 가진 의미를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호가 기억하는 도산의 모습을 최대한 충실하게 담은, 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고인과의 정신적 교감을 돕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강세황은 〈도산도〉의 제발문에서 그가 맞닥뜨렸던 어려움을 고백하고 있다.
세황은 아직 몸소 도산에 가본 적이 없다. 세간에 전해오는 〈도산도〉는 차이가 많아 누가 그 진면목을 얻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이 그림은 선생께서 예전부터 소장해오던 본에 따라 구본(舊本)을 이모한 것인데, 누가 그렸는지 모르겠지만 붓놀림이 졸렬하여 물체를 형상하지 못하였고 위치도 잘못되어 되는대로 여서 이치에 닿지 않으니, 흡사하거나 흡사하지 않음은 물론하고 반드시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억지로 그린 것이다. 지금 방불하게 그리려고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도산도〉의 함의는 충분히 이해하였지만 강세황은 실경산수화를 그리는 데 필수적인 도산서원의 현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도산에 가보지 못한 그가 참고할 수 있는 전거는 이익이 소장한 오래된 〈도산도〉에 불과하였다. 구본의 〈도산도〉는 산수의 형상도, 위치도 이치에 맞지 않게 그려진 그림이었다. 구본이 지닌 결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강세황은 모종의 회화적 기법을 시도해야 했을 것이다. 강세황이 이 작품에서 이룬 성과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구본의 <도산도>와 직접 대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가 참고한 구본의 그림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이를 대신하여 강세황보다 이전 시대에 그려진 도산도와 비교하고자 한다.
최창석, <이문순공도산도>, 종이에 채색, 39×275.5cm,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도서관 소장의 <이문순공도산도(李文純公 陶山圖)>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산도의 하나이다. 이 그림의 제작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7세기에 유행한 실경산수화 화풍으로 그려져 강세황이 보았던 <도산도>가 어떤 그림이었는지 그려보는 데 참고가 된다.
두 그림에 나타나는 차이를 기준으로 강세황이 <도산도>에서 구사한 방법을 규정해 보면 ‘문인화풍과 원근법’의 적용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전 시대의 그림이 산의 표면에 빽빽한 준법(皴法)을 가하여 어둡게 표현된 데 비해, 강세황은 간결한 필선 중심의 묘사로 화면에 밝고 담백한 분위기를 부여하였다. 동시에 원근법을 활용하여 화면 전체에 입체적인 공간감을 불어넣었다. 이처럼 필묵법과 화면 구성 방식을 바꾼 강세황의 〈도산도〉는 원대의 문인화가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즉, 강세황은 본래 실경산수화로 그려진 <도산도>를 맑고 담백한 필묵의 묘미를 강조하는 정통 문인화로 재해석한 것이다.
강세황, 〈도산도〉.
황공망, 〈부춘산거도〉 부분. 1350년, 종이에 수묵, 33×636.9cm, 대북고궁박물원 강세황이 기존의 〈도산도〉 형식을 버리고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새로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강세황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 제작 시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세황이 〈도산도〉를 그린 날은 1751년 10월 15일이었다. 이 날은 이익의 70세 생일을 직전에 둔 시기였다.
〈도산도〉는 학자로서 살아온 성호의 칠십 평생을 기념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산도 제작의 전부는 아니었다. 강세황은 제발에서 성호의 상황에 대하여 “신음하며 지친 시기(呻吟委頓之際)”라 묘사가 등장한다. 인생의 보편적인 고난을 넘어서는 의미를 담은 이 구절은, 아마도 1751년 5월에 있었던 성호의 아들 이맹휴(李孟休, 1713~1751)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맹휴는 성호가 만년에 얻은 귀한 자식이었지만, 1751년 39살의 이른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무렵에 강세황은 성호의 지치고 우울한 심사를 위로하고자 직접 가야금을 연주해 주기도 하였다. 다음은 성호가 강세황에게 지어준 글의 일부이다.
내가 아들의 근심이 있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광지가 와서 거문고를 어루만져 심방곡(心方曲)조로 연주하니 근심하던 자가 기뻐하고 병든 자가 깨어나는 듯했다. 내가 생각하건데 광지가 갑자기 계곡과 산을 따라 와서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李瀷, 『星湖全集』 卷52, 「姜光之世晃蕩春臺遊春詩軸序」)〈도산도〉의 제작 시기를 보면 비록 직접적인 언급은 없더라도 강세황의 〈도산도〉에서 아들을 잃은 노학자를 위로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인생의 고단한 시기에 강세황이 의미 있는 그림을 그려준 이면에는 두 사람이 안산에서 맺은 돈독한 인간적 이해와 공감이 있었다. 성호와 강세황이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나누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들 사이에서 중요한 동질성을 목격할 수 있다. 두 사람 간의 동질성이란 바로 시간차를 두고 반복된 정치사적, 개인사적 경험의 유사성이다. 강세황보다 한 시대를 앞서 살았던 성호는 갑술환국 이후 남인의 몰락을 경험했던 세대였다.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형 이잠(李潛, 1660~1706)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그는 출사를 포기하고 안산에 은거하여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강세황이 안산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성호와 유사한 이유에서였다. 1728년 영조의 정통성에 의의를 제기하며 소론, 남인 및 소북이 연합하여 대규모 내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다. 난은 한 달 여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소북의 당색을 지녔던 강세황의 집안은 그 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1744년 강세황은 서울에서 처가인 진주 유씨가가 터를 잡고 살았던 안산으로 이주하였다.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가문을 책임지고 재기를 모색해야 하는 강세황의 처지는 성호와 다르지 않았다. 세대는 다르지만 공통된 운명은 성호와 강세황이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고 연대감을 나누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강세황의 회화와 예술은 이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강세황이 성호와 함께 보냈던 1750년대는 그의 예술세계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상승해 나가는 분절점을 이룬 시기였다. 이 기간에 그는 독특한 서양식 원근법을 활용한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제작하였으며, 그의 첫 번째 자화상을 시도하며 기념비적인 70세 자화상을 향한 첫걸음을 떼기도 했다. 이들과 동시기에 제작된 〈도산도〉는 그가 문인화가로서 풍부한 지식과 확고한 내면세계를 정립해나가는 과정에 성호와의 인간적인 만남, 그리고 학문적인 영향이 있었음을 그려보게 한다. 강세황과 성호가 그린 〈도산도〉는 조선 문인들의 도를 향한 성찰, 예술과 인생이 만나는 자리로서 조선 후기 문인화의 정점에 위치하는 그림이라 할 것이다.
1) 강세황의 〈도산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산서원도〉라는 제목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제발의 명칭을 따라 〈도산도〉로 부르고자 한다.글. 이경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경기도유산위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18세기 문인화가인 강세황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문인화, 초상화, 실경산수화 및 박물관학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최근 논저로는 「표암 강세황-붓을 꺾인 문인화가의 자화상」(소명출판, 2024), 「판화에서 산수로: 17세기 실경산수화의 전환과 정선의 금강산도」(미술사와 시각문화, 2025)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