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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webzine(202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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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itute
of korean confucian culture25
08웹진 솔비움
문인화가, 사대부의 길에서 붓을 꺾다.
이 경 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강세황, 〈70세 자화상〉, 1782년, 비단에 채색, 88.7×51.0cm,
국립중앙박물관1763년 안산의 문인화가였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붓을 꺾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강세황은 오늘날 ‘18세기 예원(藝苑)의 총수(摠帥)’로 일컬어지는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그는 천재 화가 김홍도의 스승으로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강세황은 소북계 명문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부친인 강현은 숙종대에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본래 서울의 남소문 부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1728년 발생한 이인좌의 난으로 인하여 강세황과 그의 집안은 극심한 처지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가세는 기울었고 가족은 흩어졌다. 하루아침에 앞날을 알 수 없는 처지가 된 강세황은 처가를 따라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문인들과 어울리며 20여 년 동안 학문과 예술에 전념했다. 마침내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서 강세황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며 그 결과 수많은 그림 요청이 쇄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강세황은 돌연 절필을 결심했다.
강세황이 다시 그림을 그린 것은 이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절필을 마친 후 70세를 맞은 그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을 제작하였다. 그 곁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시문을 곁들였다. 그 마지막에는 “기진자사 기찬자작(其眞自寫 其贊自作)”이라며 자신이 이 그림을 그리고 이 글을 지었음을 적었다. 자화상이 거의 그려지지 않았던 조선에서 강세황의 자화상은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초상화이다. 자신이 이 그림을 그렸음을 선언적으로 밝히는 강세황의 태도에서는 화가로서의 자긍심이 목격된다. 이처럼 자신의 예술을 향한 보기 드문 자긍심을 지녔던 강세황은 어떤 이유에서 긴 절필을 했던 것일까?
강세황의 절필은 왕명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의 국왕인 영조는 문인화가로서 명성을 쌓았던 강세황에게 ‘말세에 인심이 좋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천기라 하여 업신여기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니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다시 하지 말라.’고 전하였다. 이것은 그림을 절제하라는 왕의 경고였다. 국왕의 경고는 근본적으로는 그림 때문에 강세황의 집안이 모종의 어려움에 처하지 않을까하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국왕의 깊은 배려를 이해한 강세황은 3일 동안 울었고 부은 눈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문인화가의 회화인 문인화는 교양과 인격을 갖춘 지식인들이 정신세계를 담아 그리는 그림이다. 문인화 이론을 주창한 북송의 대문호인 소식(蘇軾, 1037-1101)은 형사(形寫)를 기준으로 그림을 이해한다면 어린아이와 같은 견해라고 하였다. 훌륭한 회화는 사물의 외면만을 묘사해서는 안 되며 사물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그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인화가는 이 문인화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주체였으며 동시에 한 시대의 문화를 이끄는 사표(師表)이기도 하였다. ‘문인(文人)’이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문인화가는 낮은 신분이었던 직업 화가와 상대적인 존재로서, 사대부 출신의 화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에서 회화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대다수의 문인화가들은 명문 사대부 가문의 출신으로 그 신분에 어울리는 유교적 교양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조선을 통틀어 보면 문인화가의 수는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두서, 조영석, 이인상, 강세황 등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문인화가들 다수가 영‧정조대를 포함하는 100여 년 사이에 등장하여 활약을 펼쳤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처럼 뛰어난 화가들이 등장하여 동시에 활동한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문인화가들은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미술 사조를 수용하였으며 이를 조선 화단에 정착시킴으로서 이 시대의 미술과 문화를 진작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18세기에 등장한 화가들은 명청대 중국의 문인화를 바탕으로 조선적인 문인화를 전개시켜 이후에 화단에서 문인화풍이 폭넓게 유행하는 기반을 형성화였다. 영정조대의 문예부흥에 이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이처럼 눈부신 활약의 한편에서, 그 다수에게서 절필의 경험이 발견되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조영석, 〈말징박기〉, 36.7×25.1cm,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조영석, 〈조영복 초상〉, 1725년, 비단에 채색, 125.0×76.0cm,
경기도박물관강세황보다 한 세대 앞서 활약하였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경우를 살펴보자. 조영석은 윤두서와 더불어 조선적인 정감이 넘치는 풍속화의 유행을 선도한 문인화가였다. 그는 초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725년 조영석은 형인 조영복의 초상화 제작을 주관하였다. 조영복의 초상화는 관복과 야복을 착용한 모습의 두 벌이 제작되었다. 분홍 관복을 입은 초상화는 진재해라는 도화서의 화원이 제작하였다. 사각의 방건에 도포를 착용한 야복본은 조영석이 직접 제작하였다.
이 초상화 속에서 조영복은 맑은 미색의 도포 차림으로, 가슴에는 부채를 늘어뜨리고 두 손을 무릎에 얹은 문인의 일상의 모습이다. 조영석이 제작한 이 초상화는 조선 문인의 진면목을 담백하게 묘사한 초상화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조영석이 초상화에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던 영조는 세조의 어진 모사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영석은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였으며 이후 수 년 간 절필하며 근신하였다. 강세황과 동시대에 활동한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은 눈 속의 소나무를 즐겨 그리며 높은 기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던 문인화가였다.
이인상, 〈설송도〉, 종이에 수묵, 117.3×52.6cm,
국립중앙박물관관직에 나가게 되었을 때 이인상은 직무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며 스스로 그림을 불태웠다. 이처럼 문인화가들의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절필을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은 이른 시기의 문인화가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들의 절필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조영석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절필 사건으로부터 약 10여 년이 지난 후 영조는 다시 그에게 숙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조영석은 “기예로 왕을 섬겨서는 사대부의 반열에 들 수 없다.”며 직접 붓을 잡고 그리는 일만은 사양하였다. 조영석의 대답은 예학서의 일종인 「예기(禮記)」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문인들의 수신서로서 읽혔던 이 서적은 무당, 의사, 점사, 백공(百工) 등의 직무로 왕을 섬겨서는 덕업을 담당하는 사대부로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회화와 같은 기예에 전념해서는 사대부의 명예를 지킬 수 없다는 유가적인 가치관이 조영석에게 내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강고한 윤리관이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회화를 단념하는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강세황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영조는 강세황에게 그림을 삼가하길 권하며 ‘천기(賤技),’ 즉 ‘천한 기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조선에서 회화는 어디까지나 천한 기술이었다. 특히 조선 조정은 ‘회화는 천기’라는 명제가 관념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장소였다. 강세황은 20년 후에 다시 그림을 그렸다. 조영석도, 이인상도 어느 시기에 절필을 마치고 다시 그림을 그렸다. 물론 그림을 끝까지 단념하는 화가도 있었지만 절필은 회화의 완전한 중단일 필요는 없었다. 문인화가들에게 절필은 자신이 올바른 사대부임을 사회에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였다.
흔히 문인화가를 세속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가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조선의 문인화가는 화가인 동시에 사회의 지배 엘리트 사회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회화를 천기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들은 사대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과 마주했다. 이때 절필은 피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조선에서 문인화가는 사회적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대부 계층의 일원이었다.
글. 이경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경기도유산위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18세기 문인화가인 강세황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문인화, 초상화, 실경산수화 및 박물관학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최근 논저로는 「표암 강세황-붓을 꺾인 문인화가의 자화상」(소명출판, 2024), 「판화에서 산수로: 17세기 실경산수화의 전환과 정선의 금강산도」(미술사와 시각문화, 2025)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