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진 소개
조헌을 따라가다
18 COURSE

조헌을 따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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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옥천은 유학자 중봉 조헌의 삶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도시이다. 나라를 위한 진심어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충북 옥천군으로 내려온 조헌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에서 선비들과 정세를 논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단을 구성해 직접 전장에 나가 싸웠고 부끄러움 없는 죽음을 맞았다. 전투에서 보여준 실천적 의리 사상과 개혁안에서 제시한 경세치용의 정신까지, 율곡 이이를 흠모했던 후율 조헌은 후대 유학자들이 좇을 수 있는 길을 남겼다.

보물이 된 서당 옥천 이지당
옥천 이지당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자 의병장 조헌이 인근 학생을 모아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이후에 송시열이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뜻을 지닌 시전(詩傳)의 문구에서 끝의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 이름을 짓고 직접 현판을 썼다.
높은 누마루에 앉아 건물 앞을 유유히 흐르는 서화천의 물줄기와 뒷산의 풍경을 바라보면 우리 조상들은 ‘공부’ 만큼이나 '쉼'또한 중히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서당 건축물 첫 보물 지정, 이지당
이지당의 정면 여섯 칸은 강당이고, 양옆으로 누각이 있다. 정면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왼쪽은 독립된 지붕으로 오른쪽 누각보다 높게 지어 누마루 아래 공간 바닥을 더 깊게 파내어 삼면이 열린 부엌을 만들었다. 특히 정사(精舍) 건축에 2층의 누를 덧붙여 지은 경우는 매우 드문 형태로서, 당시 정형화돼 있던 정사 건축의 형식을 뛰어넘는 역사 · 예술 · 학술 ·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20년 서당 건물로는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2107호로 지정되었다.
주소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 126
시기 | 조선 중기
용도 | 교육

의병과 함께 전사한 학자 조헌묘소·표충사(조헌사당)·영모재

임진왜란이 터지기 수년 전부터 조선의 지배층이 일본의 동향에 대해 무관심과 무방비로 일관할 때, 그 움직임을 예사롭지 않게 주시한 선비 두 명이 있었는데 사제지간인 율곡 이이와 그의 제자 조헌이다. 조헌은 왜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한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으로 돌아간다.
조헌의 예측대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헌은 의병을 모집하여 달려나갔고, 청주성을 수복한 후 금산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의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조헌의 유해는 그의 동생 조범이 거두어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하였고, 1636년에 지금의 묘소로 이장하였다. 인근에 조헌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표충사가 있으며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인 영모재가 있다.
소식을 굽히지 않은 상소, 역할을 다하다.
조헌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위기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 정책이 하루빨리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상소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리며 자진의 소신을 밝혔다
과감하고 직선적인 기질과 정치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성향 등은 관료로서의 조헌을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향을 적극 발휘하게 하였다.
조헌묘소
주소 |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63-1번지
시기 | 1636년(인조 14) 이장
용도 | 추모, 제향
표충사
주소 |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1길 71-1
시기 | 1734(영조 10)
용도 | 제향
영모재
주소 |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1길 71
시기 | 1812년
용도 | 주거

조헌의 또 다른 호, 후율(後栗) 후율당
후율당
조헌은 자신의 소신을 왕에게도 서슴없이 나아가 진언하는 대쪽 같은 성품을 가진 선비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 성혼 등과 학연을 맺으면서 더욱 깊어졌다.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24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국가 정책에 대해 진언하였다. 특히 일본과의 정책에 목숨을 걸고 반대했지만 그의 상소는 왕의 진노를 사는 일이 많았다.
결국 1584년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군 안읍 밤티(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 후에 후율당이라 함)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부터 옥천과 조헌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스승인 율곡 이이의 뒤를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서실의 이름을 후율정사라 하였으며, 이곳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참전할 때까지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주소 |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도이길 42
시기 | 1588년(선조 21)
용도 | 교육, 제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