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진 소개
영호남의 관문
13 COURSE

영호남의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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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백두대간과 금남정맥을 사이에 두고 푸르른 금강이 굽이쳐 흐르는 금산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줄여 부른 이름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충남 최고봉인 서대산이 있는 금산의 지형은 70%가 산지이며, 해발 평균 높이가 충남 평균보다 2.5배나 높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산이 지극히 높아 들어갈수록 점점 그윽하고 깊다”고 말할 정도로, 산이 많고 높은 지형적 특징 덕분에 금산은 인삼의 산지가 되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높은 관문인 탓에 백제와 신라,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격전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과 왜군 간의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지형적 이유에서 금산은 칠백의총, 이치대첩지, 육백고지 전승탑 등 충절의 유적지가 유독 많다.

이 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칠백의총

의병장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 후 조현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전사자의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1603년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이후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1661년에 초려 이유태가 사액 상소를 올린 이후 현종이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대의’에 따라 의연하게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의 ‘종용’을 사액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의총과 종용사를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며 부지를 강제로 팔아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 잔해를 모아 산에 감추어 보관하고 있다가 1971년에 깨진 조각을 시멘트 등으로 다시 붙여 복원하였으며 2009년 석재로 재차 복원하고 비각도 새롭게 건립하였다.
광복 후 1952년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다시 지었으며, 1963년 국가에서 묘역을 확장하고 1970년에 기념관과 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전시관에서는 의롭게 살다 간 의병의 모습과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주소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216
시기 | 1592년(선조 25)
용도 | 묘, 추모, 제사

임진왜란 내륙 최초 승전지 이치대첩지

무민공 황진 장군
권율 장군과 함께 이치에서 싸운 대표적인 인물은 황진 장군이다. 황진은 남원 출신으로 세종 시절에 영의정을 지낸 황희 정승의 5대손이다. 왜란 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의 기를 죽이려 5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워놓고 이를 쏘아 맞췄다. 이를 본 황진이 그 과녁 옆에 작은 과녁을 세우고 명중시킨 다음 화살 두 발을 연속으로 쏘아 새 두 마리를 떨어뜨린 일화는 유명하다.
임진왜란 중 조선의 관군이 내륙에서 승리한 첫 전투인 이치대첩은 호남을 수호한 것은 물론 이후 청주성 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한 중요한 전투이다.
이치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쓸고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2만여 병력이 전라도 곡창지대를 노려 군량미를 얻고자 이곳을 넘으려 하였다. 이때 먼저 길목을 지키고 있던 권율 장군이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결사적으로 싸워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비록 적은 군대이지만 우리 금수강산을 수호해야 한다는 호국정신으로 2만이라는 대병력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관군과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이치대첩지는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 행주대첩과 진주대첩보다도 역사적 의의와 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전쟁 초기 왜적들이 호남 지역을 장악해 병참기지로 삼으려 했던 계획을 수포로 돌려 전세를 뒤엎는 전기를 마련한 임진왜란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주소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로 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