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진 소개
효'를 '사랑'으로
기억하게 하는 도시
8 COURSE

'효'를 '사랑'으로
기억하게 하는 도시
8 COURSE
공주
조선시대 효행에 대한 가장 높은 단계의 표창은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을 세워 기념하는 ‘정려(旌閭)’였다. 공주가 ‘효’의 도시로 불리는 이유는 이와 관련된 유적과 이야기들 때문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속 최초의 효자 향덕의 기록으로부터 굶주린 어머니에게 드릴 국을 고갯길에서 엎어 서럽게 운 이복의 이야기까지, 공원 속에 담아 기억하고자 하는 도시가 바로 공주이다.
'효'의 본질은 사랑 그리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나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것으로부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으로 발전한다. 백제의 역사를 폼은 이 도시는 ‘효’를 행해야 하는 의무이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 일상에서 유교문화를 조용히 녹여내고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효행 효자향덕비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에는 신라 경덕왕 때 살던 효자 향덕이라는 사람을 기념하는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높은 벼슬을 하거나 업적을 남긴 위인은 아니지만, 가진 것 없는 백성에 불과했던 그가 보인 지극한 효가 왕을 감동시켜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효행으로 표창받은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정려비에는 왼쪽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지극하여라, 효자여. 떳떳한 마음으로 온전함을 이루었으니 이미 허벅지 살을 베었는데 또 다시 종기를 빨았도다.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어 땅을 주고 집을 내리셨다. 마을이 효자로서 이름났으니 영원토록 그 이름 계속될지어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은 효가리(孝家里)라 불리게 되었다. 효자향덕비 옆에는 500년을 넘긴 느티나무가 1,500년이 되어가는 효자 향덕의 곁을 마치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다.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76-9
시기 | 1741년(영조 17)
용도 | 추모

국 한 그룻을 엎고 서럽게 울다 효자이복정려비각
공주 효심공원에서 만나는 고려시대 효자 이복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효’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효자 이복은 병석에 누운 홀어머니를 위해 국 한 그릇을 얻어 품에 안고 집으로 가던 중 서두르다 넘어져 국을 엎지르고 만다. 굶주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서럽게 울었다고 하여 후에 그 자리를 ‘국을 엎지르다’라는 뜻의 '갱경(羹傾)골'이라 불렀다. 현재는 그 거리 일대를 효자 이복의 역사적 배경과 주변의 근현대 문화유산과 연계하여 ‘국고개 문화거리’로 조성하였다.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중동(공주효심공원)도
시기 | 고려 후기
용도 | 추모

단풍나무숲에 둘러싸인 충남 최초의 사액서원 충현서원
충현서원은 1581년에 유학자인 고청 서기 선생이 주자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1624년에 나라에서 ‘충현'이라는 현판을 내려줌으로써 충남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논산의 돈암서원이 1660년에 사액 받을 때까지 약 30여 년간 이 지역의 유일한 사액 사원의 위상을 유지했다. 1689년에 김장생, 조헌, 송준길을 1713년에는 송시열을 추가로 모셨다.
가을 단풍나들이 명소
단풍이 절정일 때 충현서원을 방문하면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빨간 단풍잎이 서원의 붉은 기둥과 어우러진 고즈넉한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커다란 단풍나무가 서원을 수호하듯 주변 담장을 에워싸고 있다. 서원 담벼락을 한 바퀴 둘러보며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한 장소이다.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장터길 28-6
시기 | 1581년(선조 14년)
용도 | 추모